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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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딸로, 1795년 사촌인 루도비코와 결혼하여 에트루리아 왕비가 되었다. 루도비코가 사망한 후 섭정으로 에트루리아를 통치했고, 빈 회의에서 루카 공국을 받았다. 1817년부터 루카 공작부인으로 통치하며 공공 사업을 장려했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1824년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루카에는 그녀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세고비아의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내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이 15세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손녀이기도 하다.[1] 마리아 루이사는 태어나기 불과 4일 전에 사망한 언니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루이사 호세피나 안토니에타라는 이름을 받았다.[2]
2. 스페인 인판타
2. 1. 가족 관계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손녀이기도 하다.[1] 마리아 루이사는 태어나기 불과 4일 전에 사망한 언니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
스페인의 라 그란하 궁전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와 자녀는 다음과 같다.
구 분 | 이 름 |
---|---|
누나 | 포르투갈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 |
남동생 |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 |
남동생 | 제1차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
여동생 | 양시칠리아 왕비 마리아 이사벨라 |
아들 | 카를로 루도비코 (1799년 - 1883년) |
딸 |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1802년 - 1857년) |
1795년 8월 25일 마드리드에서 사촌 루도비코와 결혼했다.
2. 2. 유년 시절

스페인 세고비아의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에서 태어난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내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세 번째 생존 딸이었으며, 루이 15세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손녀였다.[1] 마리아 루이사는 7월 2일, 태어나기 불과 4일 전에 사망한 언니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루이사 호세피나 안토니에타라는 이름을 받았다.[2]
1795년, 마리아 루이사의 사촌인 에트루리아 국왕 루이가 교육을 마치기 위해 스페인 궁정에 왔다. 두 왕가는 루이가 카를로스 4세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는 이해가 있었다.[3] 그는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인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아말리아 (1779-1798)와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마리아 아말리아는 소심하고 우울한 성격이었다.[3][4] 루이 역시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열두 살의 마리아 루이사는 더 쾌활하고 외모도 더 나았다.[3][5] 마리아 루이사는 영리하고 활기차고 재미있었으며, 검은 곱슬 머리, 갈색 눈, 그리스 코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얼굴은 표현력이 풍부했고 성격은 활기찼으며, 관대하고 마음씨가 착하며 독실했다.[6]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두 인판타 모두에게 호감을 느낀 파르마 공이 결국 여동생을 선택했을 때 신부 변경에 동의했다.[7]
3. 결혼
1795년 8월 25일, 마리아 루이사는 라 그란하 왕궁에서 사촌인 파르마의 루도비코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마리아 루이사의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가 마리아 루이사의 삼촌인 안토니오 파스쿠알과 결혼하는 이중 결혼식이었다.[8] 루도비코는 이 결혼으로 스페인 인판테(Infante, 왕자) 작위를 받았다.
3. 1. 결혼 배경
루도비코는 교육을 마치기 위해 스페인 궁정에 왔고, 카를로스 4세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예정이었다.[8] 그는 원래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마리아 루이사를 선택했다. 마리아 루이사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신부 변경에 동의했다.[8]3. 2. 결혼 생활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그림 오른쪽에 남편 루도비코 옆에서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루도비코는 스페인 인판테 작위를 받았고, 1795년 8월 25일 라 그란하 왕궁에서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은 마리아 루이사의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가 마리아 루이사의 삼촌인 인판테 안토니오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식이었다.[8]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루도비코의 건강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어릴 적 대리석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힌 사고 이후 간질 발작을 겪었고, 가슴 질환도 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아내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9] 젊은 부부는 결혼 초기 몇 년 동안 스페인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가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10] 1796년 초에는 카스티야, 에스트레마두라를 거쳐 포르투갈까지 여행하기도 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 당시 겨우 열세 살이었고, 첫 아이는 4년 후에 태어났다.[11] 그녀의 첫 아들인 카를로스 루이스는 1799년 12월 22일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부는 상속받을 영토인 파르마로 가고 싶어했지만, 국왕과 왕비는 그들의 출발을 미루었다. 1800년 봄까지도 스페인에 머물렀으며, 아란후에스 궁전에 머물면서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 왕족과 함께 그려졌다.[12][13]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1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카를로 루도비코 | 1799년 12월 22일 | 1883년 4월 16일 | 파르마 공작 |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 | 1802년 10월 2일 | 1857년 3월 18일 |
3. 3. 자녀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는 카를로 루도비코(1799년 - 1883년)와 작센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한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1802년 - 1857년) 1남 1녀를 두었다.[11]4. 에트루리아 왕비
1801년, 남편 루도비코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에트루리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마리아 루이사 역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1803년에 30세의 나이로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다.[34][35]
1801년 8월 12일, 피렌체에 도착한[25]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는 피티 궁전에서 살게 되었지만, 순탄치 않은 시작을 맞았다. 마리아 루이사는 유산을 겪었고, 남편의 건강은 악화되어 간질 발작이 잦아졌다. 피티 궁전은 메디치 가문이 사용하던 곳이었으나, 마지막 메디치가 죽은 후 거의 버려졌고, 이전 통치자였던 페르디난트 3세는 대부분의 가치 있는 물건들을 가져간 상태였다.[26]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부부는 지역 귀족에게 가구를 빌려야 했다.[27]
1802년 10월 2일, 바르셀로나로 가던 중 배 위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딸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타를 낳았다.[31]
4. 1. 에트루리아 왕국 건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에 대항하여 스페인을 동맹으로 삼고자 했다. 1800년 여름, 그는 형 뤼시앵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궁정에 파견하여 아란후에스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14]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정복 후 부르봉 왕가가 파르마 공국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파르마 상속자 루이를 위해 새로운 에트루리아 왕국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새로운 왕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15]
부르봉 왕가를 위해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3세는 추방되었고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으로 보상받았다.
4. 2. 파리 방문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영국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삼고자 했다. 1800년 여름, 그는 형 뤼시앵을 스페인 궁정에 보내 아란후에스 조약을 제안했다.[14]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정복 후 부르봉 왕가에게 파르마 공작령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파르마의 상속자 루이를 위해 새로운 에트루리아 왕국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15]나폴레옹의 조건 중 하나는 젊은 부부가 파리로 가서 에트루리아를 차지하기 전에 그에게서 새로운 주권의 취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17] 마리아 루이사는 7년 전 그녀의 친척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프랑스 여행을 꺼렸다.[18][19] 그러나 가족의 압력으로 1801년 4월 21일, 부부와 아들은 마드리드를 떠나 바욘에서 국경을 넘어 ''리보르노 백작''이라는 가명으로 프랑스로 잠입했다.[20]
나폴레옹은 5월 24일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매우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젊은 부부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아브란테스 공작부인은 마리아 루이사의 성격을 ''"수줍음과 거만함이 섞여 처음에는 대화와 태도를 억제했다"''고 묘사했다.[15]
마리아 루이사는 파리 방문을 즐기지 못했다. 대부분 아프고 열이 있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남편 루이의 건강을 걱정했다. 어느 날, 루이는 말메종 성에서 마차에서 내려 갑자기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아브란테스 공작부인은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폴레옹의 집사는 마리아 루이사가 남편보다 더 현명하고 신중하며, 쾌활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가정의 의무를 성실히 다했다고 평가했다.[22]
6월 30일, 파리에서 3주를 보낸 후, 마리아 루이사와 남편은 파르마를 향해 남쪽으로 향했다.[23]
4. 3. 에트루리아 통치
1801년 8월,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는 피렌체에 도착하여 에트루리아 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에트루리아의 재정은 열악했고, 주민과 귀족들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왕과 여왕에게 적대적이었다. 1802년,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에서 열린 오빠 페르난도와 여동생 마리아 이사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28] 1803년, 루도비코는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고,[34][35] 마리아 루이사는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의 섭정이 되었다.5. 에트루리아 섭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에트루리아 왕국이 세워지고, 1801년 남편 루도비코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루이사 역시 왕비가 되었다. 1803년 루도비코가 요절하자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가 왕위를 이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이 되었다.
5. 1. 섭정 통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세워진 에트루리아 왕국의 왕 루도비코가 1803년에 요절하자,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가 왕위를 이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이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파르마 공국은 마리아 루이사에게 주어졌고, 카를로 루도비코에게는 루카 공국이 주어져 마리아 루이사가 루카 공국의 섭정으로서 통치했다.[76]5. 2. 나폴레옹의 개입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에트루리아 왕국이 세워지고 루도비코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루이사 역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1803년에 요절했고,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가 왕위를 이었으며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이 되었다.6. 망명
에트루리아 왕국에서 추방당한 마리아 루이사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밀라노에서 나폴레옹과 면담을 가졌고, 나폴레옹은 에트루리아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정복한 후 창설할 북부 루시타니아 왕국(포르투갈 북부)의 왕위를 약속했다.[42] 이는 퐁텐블로 조약의 일부였다.[15] 그러나,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가를 폐위하고 신세계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송금된 자금에 접근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마리아 루이사가 니스나 토리노에 정착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스페인에서 부모와 합류하려 했다. 1808년 2월 3일 프랑스 남부를 건너 바르셀로나를 통해 스페인에 입국했고, 2월 19일 아란후에스에서 가족과 합류했다. 그녀는 오빠인 페르난도가 아버지 카를로스 4세와 총리 마누엘 고도이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등, 분열된 궁정과 불안한 국가에 도착했다.[43]
마리아 루이사는 뮈라와 카를로스 4세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은 이들의 갈등을 이용하여 양측을 바욘으로 초청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아란후에스 폭동 당시 홍역에서 막 회복하여 여행할 몸 상태가 아니었다.[48] 그녀의 아들 또한 아팠고, 아이들과 삼촌 안토니오, 남동생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와 함께 스페인에 남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왕의 모든 친척들이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오라고 고집했다. 1808년 5월 2일, 이들이 떠날 때 마드리드 시민들은 프랑스 점령에 반대하여 봉기했지만, 뮈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바욘에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 모두에게 스페인 왕위 포기를 강요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연금과 콩피에뉴와 샹보르 성에 거주할 것을 약속했다.[50]
6. 1. 망명 생활
마리아 루이사는 밀라노에서 나폴레옹과 만나, 에트루리아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포르투갈 북부에 세워질 북부 루시타니아 왕국의 왕위를 약속받았다.[42] 이는 퐁텐블로 조약의 일부였으나,[15] 나폴레옹의 진정한 목표는 스페인 왕가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뤼시앵 보나파르트와의 결혼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부모와 합류했다.1808년 2월,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에 도착했지만, 스페인은 이미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오빠인 페르난도가 아버지 카를로스 4세와 총리 마누엘 고도이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43]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틈타 스페인을 침공했고, 스페인 왕가는 멕시코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란후에스 폭동 이후, 마리아 루이사는 아버지 카를로스 4세의 편을 들었고,[46][47]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 모두에게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아들을 위해 토스카나나 파르마로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51][15]
마리아 루이사는 퐁텐블로, 콩피에뉴, 니스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영국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49]
6. 2. 투옥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에트루리아 왕국이 세워지고, 남편 루도비코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루이사 역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803년 루도비코가 요절하자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가 왕위를 이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이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파르마 공국은 마리아 루이 sa에게 주어졌고, 카를로 루도비코에게는 루카 공국이 주어져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으로서 통치했다.7. 빈 회의
1815년 빈 회의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자신의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의 파르마 공국 계승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한 후, 파르마 공국은 나폴레옹의 아내 마리아 루이 sa에게 주어졌다.[74]
7. 1. 빈 회의 결과
1815년 빈 회의에서 파르마 공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내인 마리아 루이 sa에게 주어졌고,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에게는 루카 공국이 주어졌다. 마리아 루이사는 루카 공국의 섭정으로서 통치했다.[74]8. 루카 공작부인
1801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에트루리아 왕국이 세워지고 남편 루도비코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마리아 루이사 역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803년 루도비코가 사망하자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가 왕위를 이었고, 마리아 루이사가 섭정을 맡았다. 18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파르마 공국은 마리아 루이sa에게 주어졌고, 카를로 루도비코에게는 루카 공국이 주어졌다. 이에 마리아 루이사는 루카 공국의 섭정으로서 통치했다.
8. 1. 루카 통치
마리아 루이사는 루카 공국을 절대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억압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공공 사업과 문화, 과학, 교육 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두칼레 궁전의 내부 장식을 쇄신하고, 새로운 수로 건설과 비아레조 항구 개발을 추진했다. 종교적인 여성이었던 마리아 루이사는 성직자를 선호했고,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17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8. 2. 아들과의 관계
마리아 루이사는 아들 카를로 루도비코의 결혼을 주선했으나, 아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카를로 루도비코는 나중에 어머니가 자신을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재정적으로 망쳤다"고 불평했다.9. 죽음
마리아 루이사는 1824년 로마에서 암으로 사망했다.[1]
9. 1. 죽음과 장례
마리아 루이사는 1824년 로마에서 사망했다.[1] 그녀의 아들 카를로는 파르마 여공 마리아 루이사가 사망한 후 1847년에 파르마 공국을 회복했다.[1]10. 유산
마리아 루이사는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에트루리아 왕비와 루카 공작부인으로서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문화와 과학 발전에 기여했다. 마리아 루이사의 삶은 나폴레옹 시대 유럽의 정치적 격변과 부르봉 왕가의 몰락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11. 가계도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왕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딸로, 라 그란하 궁전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7명의 형제자매 중 3번째였다. 남동생으로는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와 제1차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있었고, 누나로는 포르투갈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 여동생으로는 양시칠리아 왕비 마리아 이사벨라가 있었다.
1795년 8월 25일 마드리드에서 사촌 루도비코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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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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